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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반도체 쇠망의 징조
1984년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치킨게임, 1985년의 미국반도체산업협회의 무역 제소에 이은 반도체 협정, 1996년까지 이어진 미국의 무역 제재, 그리고 각국의 경쟁과 견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일본 반도체 업계의 시장지배력이 곧바로 약화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1980년대부터 시작된 팹리스와 파운드리 영역의 분리 때문이기도 했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반도체 산업은 설계와 제조를 한 회사, 적어도 한 그룹에서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칩의 설계는 곧 칩의 생산을 의미했다. 이처럼 설계와 생산을 분리하지 않는 방식을 집약 소자 제조 방식이라고도 한다. 물론 이 방식이 효과를 거두려면 소재 개발, 소자 제작, 공정 개발, 수율 관리, 패키징을 포함하는 반도체 생산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수직계열화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인텔, TI, 마이크론 같은 일부 대기업만이 IDM 방식으로 반도체 산업에서의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미국의 일부 반도체 회사들이 이 관습에 도전장을 던지기 시작했다. 설계에 비해 생산 공정과 수율 관리는 막대한 자금과 인력, 그리고 시행착오가 필요했던 탓에 설계에만 집중하는 회사, 즉 팹리스들이 나타난 것이다. 설계에만 집중하는 팹리스 업체가 있다면 당연히 공정과 수율에만 집중하는 파운드리 업체도 생겨났을 것인데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최근 글로벌 반도체 생산의 지배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는 대만의 TSMC이다. 물론 모든 반도체 기업들이 설계와 생산을 분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분리 전략은 초창기에는 오히려 시장점유율 면에서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당시 시장을 리드하던 일본의 반도체 업체들은 시장 점유율 고수와 기술 유출에 대한 염려를 근거로 여전히 설계와 생산을 분리하지 않고 수직계열화된 IDM 모델을 고집했다. 수직계열화된 산업이 제 궤도에 오르면 공정이 최적화되고 의사결정의 시간이 단축되며 표준을 더 효과적으로 공유할 수 있으므로 안정된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일부 미국 회사들처럼 설계와 생산을 굳이 분리하면서까지 새로운 방식을 채택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반도체 칩의 설계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공정 기술이 뒤따라 급속히 발전하면서 설계와 생산이 통합된 방식은 더 이상 큰 이점으로 작동하지 않기 시작했다. 설계와 제조가 이원화되면서 각 분야에 특화된 기술이 더 집중적으로 개발되었고 맞춤형 칩을 만들기 위한 설계 수요가 증가하면서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제조 기술도 동반하여 발전했다. 이는 종합 반도체 생산 방식에 비해 설계에서 생산으로 이어지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을뿐더러 다변화되는 시장에 더 유연하게 대처하기에 좋은 방식이었다. 시대가 바뀐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일본의 종합 반도체 기업자들에게 있어 IDM 모델은 오히려 그들의 발목을 잡는 형국이 되었다.
일본 반도체 쇠망의 징조와 패착 세가지
그렇다면 일본은 왜 20년 동안 지배하고 있던 반도체 산업의 왕좌에서 내려오게 된 것일까? 달리 말하면 왜 일본은 겨우 20년만에 압도적으로 지배하던 시장을 잃어버리게 된 것일까? 직접적인 계기로는 1980년~90년대 일본 반도체 업체에 대한 견제를 생각할 수 있다. 조금 더 넓게 보자면 위에서 언급한 산업 구조의 재편을 일본이 따라가지 못한 측면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특히 PC 위주의 반도체 수요가 점차 정보가전과 모바일 수요로 대체되기 시작하면서 반도체칩의 다변화 기조에 대한 대응 능력이 부족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자면 그 기간 동안 급격하게 수축한 일본 경제의 저성장 기조와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2008년 전 세계 금융위기, 2011년 동일본 대지진 같은 산업 외적 요인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목적 중 하나는 일본의 쇠망사로부터 더 자세한 교훈을 얻는 데에 있기 때문에 그 기간에 반도체 기업 내부에서 정확히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 2000년~2010년대에 이들이 어떻게 실책을 거듭한 끝에 스스로 왕좌에서 내려오게 되었는지의 상세한 과정을 복기해둘 필요가 있다. 이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생생한 교훈과 함께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반도체 왕국의 패착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가장 큰 패착은 기술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과 그로 인한 세계 시장의 변화에 대한 대응력 저하다. 두 번째 패착은 혁신의 딜레마다. 시장을 압도하기 위해 과감하게 투자한 혁신 기술이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수익률을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패착은 정부의 과도한 간섭이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 초창기에는 정부가 든든한 보호막이자 비용을 절감하고 정보 공유를 가능하게 해준 훌륭한 플랫폼으로 작용하였으나 업체들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며 경쟁하던 시점에서는 오히려 발목을 잡는 꼴이 되었다. 이러한 세 가지 요인들이 어떻게 일본 반도체 산업이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왕좌를 뒤로 한 채 쇠망의 길로 가게 만들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의 여러 업체들이 쇠락하는 과정에서 보였던 가장 큰 공통점은 각 회사가 소중하게 추구하던 기술에 대한 집착이다. 이들이 그렇게 기술에 집착했던 이유로 기술 이상으로 중요했던 다른 요소를 놓치게 된 것이다. 자국의 기술에 대해 지나친 자신감을 심어준 일본 특유의 사회 분위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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